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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ate (개인적인것들)

[단편] 별 (2002. 1. 3)


 '멋있지 않니? 저기 붉은 색으로 밝게 빛나는 게 화성이래.'

벌써 15년 전의 일이었다. 7살의 내게 화성을 처음 보여준 그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평범한 길을 걷고 있었을테지. 지금처럼 매일같이 밤하늘을 헤메다가 잠드는 일은 없었겠지. 가끔 화성이 보이는 날이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평온한 내 마음의 고향, 나의 별들이여....



 어제는 간만에 집에 친구가 놀러와 진탕 술을 마셔댔다. 그동안 바빠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술보다 많은 얘깃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할말을 있는 대로 토해내고 있었다. 할 이야기 못 할 이야기, 음담패설까지 섞어가며 낄낄대며 한창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내 등 뒤로 사라져버린 세월이 후회스럽고 앞으로 다가올 나날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던 소주를 우리는 벌써 4병째 비우고 있었다.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따위는 이미 방 한 켠에 놓인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 해버린지 오래였다. 속에서 헛구역질이 조금씩 밀려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또 술잔을 들었다.

 '빌어먹을 세상을 위하여!' 

 한마디에 쓰디쓴 극약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술이란 일시적 자살행위라 했던가. 자꾸 넘어오려는 메스꺼운 공허함을 메우려 안주를 집어 들었나보다. 한참동안 안주로 배를 채우고 있을 무렵, 찬바람이 쐬고 싶어졌다. 

 "옥상에 올라가서 마시자. 덥다."

 그래도 술에 대한 미련은 못 버렸는지, 나는 엉겁결에 올라가서 마시자고 말해버렸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 상태를 느끼면서도 왠지 더 마셔야 할 것만 같았다. 녀석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남아있는 술병과 안주거리를 봉지에 담아서 옥상으로 먼저 올라가 버렸다. 나는 바닥에 깔 신문지를 찾느라 거실의 서랍을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다. 예전 신문을 어디에 두었더라.... 

 한참을 찾아 헤메다가 예전에 넣어둔 신문을 발견했다. 무슨 이유에서 거기에 넣어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별 생각 없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신문지 아래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새하얗게 먼지가 가득한 자그마한 쌍안경이었다. 나는 술에 취해 반쯤 감긴 눈으로 쌍안경을 바라보며,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7 x 50 이라는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프리즘 뚜껑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희미하게 송곳 같은 뾰족한 것으로 새긴 것으로 보이는, '1988.7.15' 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신문을 가만히 내려놓고 쌍안경을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야! 안올라오고 뭐해?"

 친구녀석이 위에서 소리쳤다. 술에 취해 혀가 제대로 꼬여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쌍안경과 신문지를 가지고 올라갔다. 새벽이 되어도 서울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여기저기 빛을 발하고 있는 가로등, 붉은 십자가, 저 멀리 보이는 전광판들이 무척이나 소란스럽게만 느껴졌다. 순간 시골에서 살았을 때 매일 밤 칠흑 같은 어둠을 더듬으며 소변을 보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것은 이 지긋지긋한 빛의 공해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서이겠지. 

 "뭐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이제 딱 한 병 반 남았다. 얼른 마시고 좀 쉬자."

 녀석은 벌써 자리에 벌러덩 누워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마시느라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신문지를 바닥에 펼치고는 신발을 벗고 위에 누웠다. 자리에 눕자 생각보다 많은 별들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울의 가로등마저 별빛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게 할 만큼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나는 쌍안경을 높이 들어 보이며 자랑스레 말했다. 

 "임마.. 이게 뭔지 알아? 15년전에 내 첫사랑이 선물해준 보물이시다."

 그리곤 키둑키둑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어리석은 말이었나보다. 원래 술을 마시면 유치해진다지. 그래, 기왕 취한 거 되는데 까지 유치해보자. 너는 이런 선물 받아본 적 없지 라는 우스운 말도 거리낌 없이 내뱉으며 나는 쌍안경을 눈에 갖다대었다. 먼지 때문에 하늘이 온통 뿌옇기만 했다. 젠장..뭘 하고 살았길래 먼지가 끼도록 가만히 놔둔거야.. 나는 툴툴거리며 입고 있던 티셔츠로 렌즈를 슥슥 닦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뭐 보이냐?"

 친구녀석이 시비조로 물었다. 마치 아무것도 안보이기를 바란다는 듯. 하지만, 쌍안경이라고 뭐 별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망원경이라도 뭐 별게있는건 아니다. 어차피 별은 별로 보일뿐이다.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려는 순간 문득 나는 옛 생각의 장막에 휩싸이는 듯한 느낌에 흠칫 놀라 쌍안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때도 그랬지.... 그때도 보였던 것은 별. 별은 그대로 별일 뿐이었다.



 "뭐야. 왜 다 똑같이 보여? 별이 이마~안큼 큼지막하게 보이는 거 아니었어?"

 나는 투덜대며 쌍안경을 다시 건네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별이 너무 작아서 그런거야. 하지만 이걸로 달이나, 화성이나 목성 같은거 보면 잘 보여."

 "어떻게 보이는데?"

 내가 실망한 듯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퉁명스레 물어보자, 소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네가 보고 싶어하는 게 보일거야. 약속할게."

 "좋아. 근데, 화성도 볼 수 있어? 책에서 봤는데 화성은 지구에서 엄청나게 멀대."

 나는 며칠 전부터 보기 시작했던 과학책에서 잠깐 봤던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여러 분야에 대한 내용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우주에 대한 내용만 골라서 읽고 있는 중이었다. 책에서 화성은 지구에서 가려면 우주선으로도 몇 달씩이나 걸린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 작은 쌍안경으로 볼 수 있다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화성은 눈으로도 볼 수 있어. 그것도 엄청나게 밝은걸. 목성도 그렇고 말야."

 "정말이야? 나 달 말구, 화성이랑 목성 보고 싶어. 이걸루 보면 더 잘 보이겠네?"

 "응. 훠~얼씬 더 잘 보여."

 "그럼 지금 찾아줘. 한번 볼래."

 그러자 소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화성이랑 목성이 보이는 때가 아니래. 나도 저번에 아빠가 알려줘서 봤었거든."

 나는 금방 실망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잔뜩 기대했는데 볼 수 없다니. 발끝에 채이는 돌을 개천으로 차 넣으며 나는 괜한 심술을 부렸다. 잔뜩 심통난 얼굴을 한 채였다. 내가 실망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소녀는 소리없이 개천가를 뛰어오르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누가 먼저 집에 가나 내기다~ 시작!"



 언제나 개천가에서 놀다가 집에 갈 때면 그렇게 경주를 하곤 했었다. 가끔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집에 도착 할 무렵 등짝에 붙어있는 벌레들을 보고 동네 여자아이들이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지르던 기억, 정월대보름이면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쥐불놀이를 할 수 있던 것도 개천가였다. 여름에 한창 장마가 지나가고 나서 물이 불어있는 개천에 물수제비를 뜨기도 하던 것도, 여름방학숙제로 곤충채집을 하던 것도.. 이제는 아스라히 타고남은 재처럼 내 가슴속 한구석에 가라앉은 추억일 뿐이었다. 개천가에서 그 아이와 함께 별을 보던 것도 그 추억의 한 조각이었을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어느 해 봄 그 아이는 어디론가 이사했고, 그 뒤로 나는 그 아이를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매일 개천가에서 소녀와 별을 보던 습관은 홀로 옥상에 올라오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뭐 보이냐니까?"

 나는 그 말 한마디에 행복한 과거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친구 녀석은 내 손에 있던 쌍안경을 낚아채듯이 집어 들고는 눈으로 가져갔다. 하늘을 이리저리 휘휘 저어보던 녀석은 '보이는 것도 없구만' 을 연발하면서도 쌍안경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러던중 녀석이 갑자기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했다.

 "야. 저거는 뭐냐? 다른 것보다 커 보인다?"

 "뭔데?"

 나는 녀석에게서 쌍안경을 건네받고는 그녀석이 가리키는 쪽으로 들이댔다. 대물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이 프리즘을 거쳐 접안렌즈로, 그리고 다시 내 눈의 망막에 맺히는 순간 나는 그저 '아~' 하고는 짧은 탄식과 함께 조용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곳을 들여다보던 나는 쌍안경을 내리며 말했다.



 "저 붉은색 별이.. 화성이야.... 정말 멋있지 않냐?"




 그 날 밤 우리는 별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그녀가 내게 주고 간 쌍안경으로 밤하늘을 헤엄치며.... 그렇게 편안한 밤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쌓아왔던 메스꺼움과 역겨운 것들을 모두 게워내고 편안한 밤을 한껏 만끽하며 잠들 수 있었다. 내 마음의 고향... 나의 별들.... 나의 밤하늘이여....